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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宗敎改革

1.

종교개혁(宗敎改革, Reformation)
• 16-17 세기 중세 교회의 쇄신을 요구하는 개혁운동
• 종교개혁은 서방 교회가 구교(카톨릭)와 신교(프로테스탄티즘)로
분열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됨.
• Re-formation: 원형으로의 복원(현재보다 더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본래의 상태로의 회귀)
• Reformatio: 본래 교회나 세속 당국의 개혁 일반을 지칭하는 용어
• 이를 통해 오늘날 프로테스탄트(Protestantism)라 부르는 교파가
생김.
• 1517년 루터의 ’95개조의 반박문’에서 촉발.

2.

종교개혁
• 18세기부터 종교개혁은 단순히 종교사적인 사건이라는
좁은 의미를 벗어나서 하나의 독자적인 시대 개념으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19세기 지식인들은 정치적인
지향성에 상관없이 서양의 역사 발전에서 중요한 혁명적
사건으로 종교개혁을 꼽는다.
• 서유럽 기독교 세계의 영구적인 분열을 가져온 사건.

3.

종교개혁의 배경
• 르네상스 휴머니즘(기독교 인문주의)의 영향
성경원전 연구를 수행하면서 초기 기독교 정신으로의 복귀를
촉구했던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비록 그들이 서유럽 세계의 분열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종교개혁의 길을 예비함.
• 에라스무스, 토마스 모어의 중세교회 비판
“에라스무스가 낳은 알을 루터가 부화시켰다.”
• 중세 봉건사회의 전면적인 위기
• 중세교회의 무능력함: 교회의 대분열, 교황권의 권위 실추
• 15세기 중엽 구텐베르크에 의해 개발된 활판인쇄술

4.

중세 봉건사회의 전면적 위기 상황
로마제국의 몰락 이후 유럽사회의 지속적인 혼란
(로마제국만큼 강력한 세력이 등장하지 않음)
내전과 외부 세력(바이킹/아랍인)의 침입 -> 계속적인 전쟁 상태
10 세기를 넘어서면서 점차 안정이 됨
-> 농업에 기반한 봉건제도의 성립
• 봉건제도 : 왕 , 교회 , 기사계급의 권력분립(세력 균형 상태) , 지역분권
• 사회안정(전쟁X) -> (황무지 개간)농업생산의 상승 -> 인구증가
• 13 세기 이후 유럽 봉건사회의 전면적 위기
농업생산의 하락( ---농지 개간 멈춤) , 늘어난 인구(- 자원 부족) ,
굶는 사람이 늘면서 흑사병(전염병)의 확산(14세기)

5.

중세 교회의 부패 , 무능력
•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치세력은 하층민에게 관심 없음- 농민
폭동과 반란의 확산 이단재판소 설치와 마녀사냥
• 봉건사회질서를 흔드는 자들을 이단으로 처벌- 공포심 주입
• 교회는 권력(왕/귀족)과 결탁 , 부패, 재산을 불리는 것이 성직자의
주요 관심
-면벌부 판매와 헌금을 유도하기 위한 성경의 왜곡.
-성경의 본질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증가.(그리스어로 된 신약 성경 공부)
**존 위클리프(1320~1384): 진리의 근거는 교황/교회가 아니라 성경이다!
1382년에 성경을 영어로 번역 (교회가 금지)
***교황을 중심으로 한 교권주의자 vs. 성경을 중심으로 한 개혁자

6.

머리에 뿔이 달린 모세

7.

기독교 내부의 비판
• 에라스무스, <우신예찬>(1511): 교회와 성직자의 타락 비판
(네덜란드: 항구 도시들로 구성된 국가. 르네상스의 영향)
• “초기 교회의 순수한 정신으로 돌아가자”
-> 교회의 청빈(예수 그리스도의 정신)
• 과거로의 회귀 ? 종교개혁이 근대의 탄생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중세 기독교 질서를 해체하는데 큰 공헌

8.

면벌부(indulgence, 免罰符)
• 교황 레오 10세가 성베드로 성당 건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급한
면벌부가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에 의해 독일에서 대대적으로
판매된 것이 종교개혁을 촉발시킨 직접적인 도화선이 됨.
• 원래 면벌부는 죄를 지은 신자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기도나
고행, 자선행위, 성지순례와 같이 교회에서 요구하는 일정한 속죄
행위를 했을 경우 교황이 교회 공동체를 대신해서 그 죄에 상응하는
벌을 용서해줄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는 생각에서 비롯됨.
***“연옥 獄/purgatory)”(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는 기회)
면벌부는 천국에 대한 증서.
*수도사 테첼: “면벌부를 사면 과거의 죄뿐만 아니라 미래에 지을 죄까지
용서받을 수 있다. 죽은 가족, 친척들까지 연옥의 고통에서 해방받을 수
있다.”

9.

10.

95개조의 반박문

11.

95개조 반박문

12.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
• 독일의 신학교수 루터는 에라스무스로부터 영향을 받아 교회 비판.
• 1517년 10월 31일에 95개조의 반박문(ninety-five theses)을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써 붙임으로써 종교 개혁 운동의 불을 당김(면벌부 판매를
비판)- 라틴어로 쓰인 반박문이 독일어로 번역, 수천 부씩 인쇄.
• 1521년 교황 , 루터 파문(파문은 교회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 루터는 파문 칙서를 공개 소각 교황청과 루터의 극단적
대립- 카를 5세 , 루터에게 화해 권유 , 루터 거절- 작센 영주 프리드
리히가 루터를 보호.
• 숨어 지내면서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라틴어 대역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서 출간.

13.

마르틴 루터의 핵심 주장
• 솔라 피데(Sola fide)-오직 믿음으로
: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영혼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사제의
중재를 통해서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이야기.
•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오직 은총으로
: 루터는 은총은 노력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선물로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행과 특별한 행위로는 죄를 깨끗이 씻거나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
•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오직 성서만’원칙
: 루터는 교회 관행의 핵심, 면벌부 판매를 질타. 성서에 없는 어떠한
관행이나 신앙도 구원의 추구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 루터는
성서만이 기독교 신앙과 관행의 지침이라는 것을 강조.

14.

만인사제주의(priesthood of all believers)
• 성직자와 평신도와의 관계 규정. 만인=사제.
중세 교회에서 사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모든
성사를 인도할 뿐 아니라, 고백을 듣고 죄의 경중을 판단하며,
신을 대신해서 죄를 용서한다. 그러나 경건한 행위나 예배
의식이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면 의식의
인도자인 사제의 역할은 축소되며, 더 나아가 구원이 신과
개개인의 문제라면 사제라는 중재자는 필요가 없어진다.

15.

모국어 번역과 인쇄술
• 후스 시대와 루터 시대의 중요한 차이 하나는 인쇄기의 발전과 읽고
쓰는 능력의 증대였다.
• 16세기 초 남성 문자 해독자 비율은 10% 16세기 말에는 50%.
• 루터가 원래 라틴어로 작성한 95개의 반박문을 몇몇 친구가 독일어로
번역해 인쇄하지 않았더라면 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인쇄기가 발명된 것은 1450년 무렵인데, 이즈음 독일과 중앙 유럽의
중심지 300여 곳에 이미 3000개가 넘는 인쇄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그 결과 루터의 95개의 반박문은 몇 주 만에 독일 전역으로
퍼져났다.
• “인쇄기는 신의 은총을 보여주는 사례”(루터)

16.

자국어: 민중의 언어
• 위클리프는 라틴어 성경(불가타 성경)을 영어로 번역. 성경 보급을
위해선 자국어 성경 번역이 필수. 후스는 체코어로 설교를 함. 1630년
무렵 성서가 보헤미아어로 완역됨.
“ 성서를 모국어로 읽을 수 있게 되자(로마가톨릭 사제들은 성서 지식을
다루는 일을 사제들만의 특권으로 남겨 둬야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대중은 이내 신약에서 겸손과 극기가 아닌 부자를 향한
증오를 끌어냈다.”
“ …지상에는 왕도, 통치자도, 신민도 없어야 한다. 따라서 통행세와
세금은 모두 폐지되어야 한다. 만인은 동등한 형제, 자매이므로
누구도 다른 이를 힘으로 부려선 안 된다….”(타보르파 Táborité)
**급진파들은 교육을 중요시함.

17.

루터 성경의 등장
“루터는 신약을 아주 빠르게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10년간 꼬박
구약성서에 매달렸습니다. 구약이 훨씬 오래 걸렸습니다.”
(Susan Leed, 영국국립도서관)
“루터는 엄청난 학식의 소유자입니다. 그렇지만 평범한 사람들과
교류하여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점이 이례적이죠.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루터는 일상적인 구어체 표현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을 독일 농부처럼 말하게
만들어서 비웃음만 사게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결과는 전혀
딴판이었었습니다. 성경에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이전 번역본과는
문구가 달랐기 때문입니다.”(Alexander Weber)
• 루터의 언어, 표준 독일어가 되다!

18.

인쇄술
• 종교개혁은 서양사에서 선전선동에 인쇄술을
적극 활용했던 최초의 사례이자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에 기초해 광범위한 대중적 여론(혹은
공론장)을 창출해냈던 사건이었다.

19.

인쇄술의 발전
• 서유럽에서 인쇄술이 발전함에 따라 지식과 사상이 폭발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이러한 새로운 정보 기술이 종교개혁을 자극함.
• 수많은 대중이 종교개혁을 지지하게 만든 것은 신학뿐만 아니라
인쇄기였다. 책과 정보의 보급이 더욱 일반화되고 저렴해지자 민중이
새 번역 성서와 교리를 배우고 읽혔다. 봉건시대 내내 서유럽
곳곳에서 제도화된 기독교를 둘러싼 수많은 공격이 있었다.

20.

루터+영주들 vs. 교황+황제
• 영주들은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루터를 지지.
• 1555 년 아우크스부르크 평화조약 (루터파의 승리)
-- “통치자가 종교를 결정한다(crius region, eius religio)”
: 이 규정은 모든 개인에게 신앙의 자유를 부여하거나 종교적 관용을
허용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특정 종교를 신민들에게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을 영주들에게 부여함으로써 통치자들의 권력 강화에 기여했다.
*** 영주들은 자기 영지 내의 교회를 접수
->황제로부터 정치적 독립, 교황청에 들어가는 교회 세금 차단, 막대한
교회 재산 차지.
*1524-1525 독일농민전쟁 <- 루터의 영향(만인사제주의, 기독교인의 자유)
- 그렇지만 루터는 농민들을 비판 , 영주를 옹호.

21.

장 칼뱅(Jean Calvin)

22.

칼뱅의 종교개혁
• 츠빙글리Zwingli (스위스 취리히)
• 칼뱅Calvin (스위스 제네바)의 예정설(doctrine of predestination)
: 칼뱅은 개신교 역사에서 가장 큰 국제적인 영향력을 발휘. 루터의 신학
사상이 행위가 아닌 믿음에 의한 구원에서 출발하고 있다면, 칼뱅은
무엇보다도 신을 아는 지식을 중시했고 신은 태초부터 구원을 받을
사람과 멸망당할 사람을 예정해 놓았다는 예정설을 강조
***칼뱅은 신정정치(theocracy) 체제를 구축
: 칼뱅+ 시 관료들 무도회 금지. 도박 금지. 선술집 폐쇄. 극장 폐쇄.

23.

막스 베버(Max Weber)(1864~1920)

24.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16-17세기 서구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던 심리적 요인을 개신교, 특히 칼뱅주의에서 찾고자 했다.
베버의 논리에 따르면, 예정설을 신봉했던 칼뱅주의자와 청교도들은
사치와 향락을 배격하면서 성실하게 직업 노동에 종사하는 것과 그로
인한 부의 축적을 자신들이 신에 의해 선택받았음을 증명하는 징표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독특한 종교적 심성에서 유래한 금욕주의적 직업윤리 의식이
결과적으로 이윤추구 활동을 윤리적 의무로 여기는 자본주의 정신의
출현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베버 명제의 핵심이다.

25.

헨리 8세와 앤 불린

26.

잉글랜드의 종교개혁
• 16세기 종교개혁에서 종교와 정치는 상호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는데, 이를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잉글랜드의 사례.
•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에서는 종교적인 교리문제나 특정 종교개혁가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니라 국왕 헨리 8세의 이혼문제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 헨리 8세---에스파냐 출신 왕비 캐서린----궁녀 앤 블린
• 1534년 제정된 수장법(Act of Supremacy)을 통해서 국왕은
카톨릭교회에서 독립한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聖公會/Church of
England)의 수장임이 공식적으로 천명됨: ①국왕이 교회의 수장이 됨.
②영국 성공회가 영국법의 영향을 받게 됨.
• 이후 헨리 8세는 수도원을 해산하고 수도원의 막대한 토지재산을
몰수해 왕실수입을 늘림으로써 왕권강화에 기여.

27.

카톨릭 종교개혁/반(反)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
• 16세기 카톨릭교회의 대대적인 갱신 운동.
• 예수회(Society of Jesus): 로욜라 교황의 인가를 받아 창설된 수도회
조직.
-교육과 선교 사업에 주력. 유럽 곳곳에 신학교와 고등교육기관을 세워
능력있는 성직자들을 배출했으며 유럽의 여러 지역을 재카톨릭화함.
-16세기에 유럽의 무역로가 전세계로 확장되면서 유럽인들이 아시아와
아메리카로 대거 진출하자 예수회 소속 선교사들도 교세 확장을 위해
일찌감치 해외 지역에 눈을 돌림.
-마테오 리치: 16세기 말, 17세기 초에 중국 명(明)나라에 머물면서 천주교
외에도 지리학이나 기하학과 같은 서양의 학문을 전수함으로써 동양과
서양의 문명 교류사에 큰 발자취를 남김.

28.

당대 보통 사람들의 종교적 저항의 성격은 어떤 것이었을까?
• 신학자들은 로마카톨릭교회 기구에 맞선 저항을 주로 신앙 문제로
바라봤을지 몰라도 보통사람들은 종교적 이의제기를 기성 질서(세속
질서든 교회 질서든)를 거부하는 외침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교회세와 같은 교황청의 착취에 맞서자는 주장에 공감한 사람들은
곧바로 속세의 억압에도 의문을 던졌다.
• 성서로 돌아가자!: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9.

종교개혁의 한계
후스와 달리, 루터, 칼뱅 등은 주로 지방 통치자와 지역 엘리트들에게서
보호를 받음.
로마카톨릭교회를 거부하면서 계급사회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었다.
혹자는 루터파가 교황 없는 로마카톨릭교회일 뿐이라고 비난함.
16세기의 유럽의 의제에 종교의 개혁은 있었지만 사회의 개혁은 없음.
종교의 개혁조차 그리 심도 깊지는 못함. 루터가 세웠든 헨리 8세가
세웠든 새 교회는 과거에 로마교회가 그런 것과 똑같이 세속 권력을
지지함. (종교 개혁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윤리와 도덕이 아니라 올바른
신학 노선의 정립. 교회의 부패를 비판한 게 아니라, 잘못된 교리(행위에
의한 구원)을 비판)
중부 유럽에서 종교개혁의 보수파와 급진파가 서로 가장 극적이면서
유혈이 낭자하게 충돌한 곳은 독일이었다. (1524년 독일농민전쟁)

30.

토마스 뮌쩌(Thomas Münzer)

31.

독일 농민전쟁 기념 행진(2013년)

32.

독일농민전쟁
1524년 6월 독일 남부에서 농부 한스 뮐러의 주도하에 농민 반란이 일어남.
1525년 2월 농민들은 <12개 조항>을 작성.
“ 십일조의 10% 이상을 공공 목적에 쓸 것-”농노는 소유물이 되어선 안
된다.””과부와 고아를 억압하는 상속세, 사망세 폐지해야 한다!” “낚시하고
사냥할 권리의 회복”----농민들은 이것이 루터의 개혁 정신에 부합한다고
생각했지만, 루터는 보수화되어 농민들을 저버림.
*학식이 높은 사제였던 토마스 뮌처는 1519년 루터를 만나 추종자가 되지만,
농민들을 탄압하는 루터를 비텐베르크의 교황이라고 비난함.
*츠비카우(광부vs. 상층계급)의 주임 사제로 봉직.
****독일어 예배 도입(루터보다 3년 먼저)
***그리스도의 고난 강조.
*** “만인은 평등하다”는 원칙.

33.

농민(뮌처) vs. 루터
• “누구든 찌르고 때리고 죽여라. 그리하다 사망하는 이에게 복이
있을진저! 그보다 더 축복을 받은 죽음은 없을지니…(이 살육이)
하느님을 기쁘게 함이라. 이게 내가 아는 바다.” 루터<살육과 약탈을
일삼은 농민 무리에 대항하여>
• “ 당신(=루터)이 보름스에서 신성로마제국 앞에 당당히 선 것은
당신이 코에 입 맞추고 꿀을 발라 준 독일 귀족계급
덕택이었다…악마가 당신을 집어삼킨 게 분명하다….당신의 살은
당나귀 같아서 천천히 요리돼야 했다.” 뮌처<왕후들에게 보내는
설교>

34.

농민 봉기 진압의 결과
• 10만 명의 독일 농민 학살(농민의 홀로코스트). 진압 작전 비용을
농민들이 전쟁 배상금으로 지불.(실제 전쟁 비용의 2배를 걷음)
• “ 진압 비용을 댄 것은 대부분 반란자였다…농민의 사회, 정치, 경제
권리를 인정하라는 요구로 시작된 투쟁이 더 심한 예속으로 끝난
셈이다.”(Thomas F. Sea)

35.

종교개혁의 영향
• 개신교(Protestantism)의 등장 -> 교황의 영향에서 벗어난 기독교
• 성서 중심의 기독교 -> 성직자의 권위 하락
• 민족어로 성경 번역 , 민족문학의 발달,
--- 지식의 확산으로 이어짐
• 성직자의 결혼 인정 -> 인간의 세속적 감정 긍정
• 부르주아 계층의 지지 -> 물질적 성공을 추구하면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 ( 칼뱅주의 )
• 중세 권력 질서의 균열
-> 새로운 사회 질서가 등장할 수 있는 기반 제공

36.

종교개혁은 근대를 열었는가?
종교개혁가들이 지향한 바는 결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개혁운동이 아니었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단지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교리체계와 관행들을 바로 잡아 초기 교회의 순수한 신앙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지향하는 목표는 과거였으며, 이들이
운동을 전개하면서 나타나는 실천들 속에서는 근대적 요소보다 권위적
요소가 강하게 드러날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설파한 교리
속에는 근대민주사회의 뿌리가 될 씨앗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권위에 대한
반항은 보다 진보적인 운동과 사고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종교개혁 자체는 근대의 출발이 아니나 그 내면에는
근대를 열어가기에 충분한 잠재력이 내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37.

번역 성서에 대한 열망
***번역 성서에 대한 열망은 종교개혁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였다. 번역
성서는 정치, 과학, 문학, 나아가 좁은 의미의 종교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글을 읽고 쓰는 능력과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이
우리의 삶에 평생 동안 영향을 준다는 사실도 깨우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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